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 2019

2020. 2. 1. 23:34몰입.log/영화

1월부터 정말정말 아름다운 영화를 봤다. 오랜만에 더 찾아보고, 기록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영화였다.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이다. 후... 영화 보고 지금까지 진정이 되질 않아ㅜㅜ 다른 영화를 보고 싶지도 않아ㅜㅜ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 2019

 

출연 : 엘로이즈(아델 하에넬),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 감독 셀린 시아마
줄거리 : 여성의 능력이 있는 그대로 인정 받지도, 선택권이 존중 받을 수도 없었던 시대. 프랑스의 어느 섬. 귀족 엘로이즈(아델 에넬)은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 받고 있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 받는다. 조건은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 그 과정에서 둘은 사랑이 시작됨 인지한다.

 

>>> 이 아래 후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좌-엘로이즈(아델 하에넬), 우-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시선   

시선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영화였다. 이 점에서 캐롤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순간. 캐롤을 보면서도 그 어떤 직접적인 성관계에 대한 묘사보다 둘의 시선이 더 에로틱하다고 생각했다(내 기준 캐롤은 정말 격정멜로였다ㅜㅜㅜ.) 불초상에서의 시선은 좀 더 직접적이다. 그리려고 하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은 서로를 뜯어지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처음 엘로이즈가 등장하는 순간이 매우 기다려졌다. 우리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보는 그 순간까지 엘로이즈를 확인하지 못한다. 마리안느와 동시에 엘로이즈를 발견하고,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엘로이즈를 본다. 엘로이드의 검은 후드가 내려가는 그 순간이 매우 떨렸다.

▲집 밖을, 걷고 뛰는 것을 그리워 했던 엘로이즈 (네이버 영화, 스틸컷)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마리안느. 마리안느에게는 몰래였지만, 보는 내내 대놓고라고 생각했던. (스틸컷)


초반의 시선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시선을 따라간다. 정적이고, 엘로이즈의 시선을 받는 순간 그 대상이 마치 나인 것처럼 숨이 막힌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시선은 뭐가 다를까. 

결혼 당사자인 엘로이즈보다 더 먼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집에 보내질 초상화. 엘로이즈의 결혼을 결정지을 초상화. 그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 그러기 위해 하루에 한 번 나가는 산책 동안 그녀를 관찰하는 마리안느.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수영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몰랐던 엘로이즈 (스틸컷)


초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하고 완성시킨 그림은 마리안느의 말처럼 관습과 규칙에 기반한 그림이다. 결혼 상대를 위한 그림이고,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그림이다.  엘로이즈가 웃게 하기까지 시간이 올래 걸렸다는 마리안느는, 웃지 않는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엘로이즈를 그렸다. 엘로이즈는 그 그림을 보면서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너도 별반 다를 것 없는 화가라는 듯 한 시선을 던진다. 

▲두 주인공은 거의 단벌 차림인데, 그게 또 좋았다. (스틸컷)


일방적으로 관찰하고 그리는 화가의 위치가 더 권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주도권은 마리안느에게 있고, 엘로이즈가 할 수 있는 것은 포즈를 취하거나 취하지 않는 것 뿐이다. 엘로이즈는 귀족이지만, 원치 않는 결혼을 위해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그녀는 가장 수동적인 위치에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모델의 위치에서 마리안느를 똑바로 응시한다. 당신이 나를 보는 동안 나 역시 당신을 본다고 말한다. 평등한 위치. 평등한 관계.

관습에 의해 그려진 모습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엘로이즈. 마음이 가는 상대에게 실망함과 동시에 당신이 본 내가 이런 모습이었냐, 나를 똑바로 보고 제대로 그려봐라.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그 그림의 완성이 결혼이라는 걸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도 알고 있는 상태지만 말이다. 영화가 흘러가는 도중 잠깐의 언급과 갈등은 있지만 결국 결론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림을 완성시키는 그 과정이 둘의 사랑을 확인하고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하게 허락된 시간이었기 때문에.

▲마리안느가 남기는 있는 그대로의 엘로이즈. (스틸컷)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고 나서 달라진 엘로이즈의 표정들이 돋보였던. (스틸컷)

 

사운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음악이 끼어 드는 순간 지금까지 영화가 매우 조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배우들의 목소리와 자연히 나는 소리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다. 바다소리, 종이에 콩테가 부딪히는 소리, 물감을 섞는 소리, 저택의 목조바닥이 삐걱이는 소리, 장작이 타는 소리.

둘의 관계의 시작 즈음에 마리안느가 직접 서툴게 연주하는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은 성당에서 듣는 소위 죽은 음악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끼는 엘로이즈를 더 강하게 흔들고 깨우는 소리다.

이 음악은 엔딩에 다시 한 번 강렬하게 등장한다.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비춰지는 엘로이즈의 모습. (모르는 것인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마리안느에게 절대 시선을 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음악과 함께 호흡이 가빠지고, 눈물이 흐르고 미세하게 떨린다. 마리안느의 시선에서 그녀를 보면서도 온전히 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엔딩이었다. 

정말 강렬한 음악은 세 사람이 '축제'라고 표현한 그 모닥불의 밤모임 장면에 나온다. 사실 이 장면이 나올 때 장르가 바뀌나...? 싶을 정도로 굉장히 낯설었다. 그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이 섬에 다른 사람들이 살기는 하는걸까? 싶었고. 소피의 낙태를 돕기 위해서 참여한 밤의 축제는 마치 주술 음악 같은 음악과 함께 고조된다. 그리고 그 고조된 감정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교차되는 시선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게 느껴진다. 사랑이자, 신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붙은 불. 꽂꽂하게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엘로이즈의 모습.

▲마리안느에게 강렬히 기억 되었을 그 모습.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오르페우스 신화

오르페우스 신화는 영화 안에서 주인공들만의 해석으로 다양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셋은 모여서 이 이야기를 읽고, 각기 다른 생각을 말한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기를 포기하고 시인이 되길 선택한 거라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뒤돌아 봐' 라고 얘기 했을 거라고. 엘로이즈의 해석은 에우리디케의 시선이다. 아래에 남기로 한 에우리디케의 선택. 이름조차 오르페우스 신화로 이름붙여진 오르페우스 중심의 서사인 신화 안에서 '객'인 에우리디케의 목소리.

▲엘로이즈가 웃을 때 잡히는 입가의 주름이 너무 매력적이었음ㅜㅜ (네이버 영화, 스틸컷)


마리안느가 떠나기 전 '뒤돌아 봐'라고 말하는 엘로이즈. 마리안느는 뒤돌아 보지만 문 틈으로 들어온 빛만 받은 엘로이즈의 모습은 정말 찰나에 지나간다. 이 순간이 너무나 짧아서 더 잔상이 오래 남는 것 같다. 그렇게 시인은 아니지만 '화가'로서 존재하게 되는 마리안느와, 직접 마리안느를 보내주는 엘로이즈의 모습이 완성이 된다.

 

소피

소피 캐릭터를 초반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역할일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롤'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집을 떠난 순간 집 안은 평등해진다. 세 사람은 함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소피의 낙태라는 미션을 해결하고, 함께 게임을 하고, 식사를 하고, 토론한다. 정면으로 화면에 담기는 테이블에서는 소피는 수를 놓고 엘로이즈는 저녁을 준비한다. 셋은 함께 침대를 쓰고, 아픈 소피를 돌보기도 한다. 그들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어떤 연대감.

소피가 둘의 스토리에 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계급의 문제가 드러난다. 원치 않는 임신과 주인이 없을 때 이를 조용히, 확실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그녀. 오르페우스 신화를 읽으며 뒤를 돌아봐 에우리디케를 저승으로 돌려 보내는 오르페우스를 비난하는 그녀.

그녀의 낙태는 영아들이 뒹구는 침대에서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 불편할 수 있지만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현실이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소피(루아나 바야미). (스틸컷)
▲함께 약초를 찾는 세 사람. (스틸컷)

 


 

+ 엔딩 장면이 너무너무 좋았다. 그에 앞서 마리안느가 살롱에서 엘로이즈의 그림을 발견하는 것도 좋았다. 엘로이즈는 그 그림을 왜 허락했을까. 오로지 마리안느에게 보여지길 기대했을 것이다. 그 빤해보일 수 있는 28 페이지가 좋았다. 오프닝에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둘이 함께 하는 결말은 아니지만 비극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둘은 언제까지고 각자 사랑을 품고 살아갈 것 같은 느낌. 헤어지기 전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라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말이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은 느낌.

+ 영상미. 그리고 주연 두 배우가 굉장히 클래식하게 아름답다. 모닥불, 그리고 자연의 빛만 사용한 것 같은 저택에서의 모든 순간순간이 아름다웠다. 

▲엘로이즈를 만나기 전 날 밤의 마리안느. (스틸컷)
▲알고 보면 슬픈 장면. (스틸컷)
▲모든 영상이, 순간순간이 너무 예뻤다. (스틸컷)


+ 시대상을 어렴풋이 짐작해야 한다는 게 슬펐다. 영화 안에서 둘의 감정은 전혀 이상한 것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적어도 두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거나 이 때문에 갈등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없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그냥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는데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질 것은 아니었다. 이름을 붙일만한 사랑의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둘의 모습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화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헤어짐으로 보였다. 둘은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시작부터 알고 있었다. 둘 다 서로 당신은 '대담'한 사람일 줄 알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이 영화가 좀 더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은 이유는 완벽한 '혼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곳에서 상영해주는 영화가 아니라서, 보고싶은 마음에 조금 거리가 있는 영화관을 향했다. 예매 할 때까지 예매자는 나 혼자였다. 그래도 들어갈 때까지 설마... 나 혼자 보겠어? 하는 마음이었는데 정말 나 혼자였다^___^ 당황스러움 반 주체 못 할 기쁨 반? 몹시 조용한 영화라서 작은 소리라도 소음이 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쾌적하게 오로지 영화에만 몰입을 하면서 봤다. 엔딩에 너무 좋아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것도 안비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이야기를 오로지 혼자서 들춰본 것 같은 느낌. 


+ 이렇게 분기별로 다시 챙겨보고 곱씹을 영화가 또 하나 생겼다ㅜㅜ

+ 포스터조차 다 예뻐 고를 수가 없어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