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Carol) 한/영 각본집 2쇄

2020. 3. 2. 22:51몰입.log/독서

 

캐롤 한/영 각본집 2쇄를 샀다. 1쇄랑 표지랑 패키지 디자인이 달라졌다. 2쇄 표지는 페이퍼 아트로 디자인되어 있는데,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각본집 자체도 예뻐서 만족감이 높은데, 각본집 구성과 내용은 더더 좋았다. 아가씨 이후에 실로 오랜만에 사 보는 영화 각본집이었는데, 정말 이건 소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캐롤 각본집(광대가 내려오질 않는다^__^)

각본집과 함께 영화를 다시 봤다. 각본집과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보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다. 너무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각본집에는 영화에선 삭제된 장면들이 꽤 있어서 영화에 없었던 장면들을 상상하는 게 무척 행복했다. 

각본집을 보면서 행복하게 곱씹은 내용들을 간략하게 기록으로 남겨본다.

*주의*

아래 후기, 넋두리(?)에는 물론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각본집에는 있고 영화에는 삭제된 장면들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룬다. 줄거리를 줄줄 읊지는 않지만 충분히 스토리라인이 예상 가능할수도 있다.


2쇄에는 멋진 책갈피도 있다ㅜㅜ 아까워서 잘 만지지도 못해... 벽에 붙여놔야지!

 

1. 캐롤과 테레즈가 카페에 있고, 잭을 만나는 첫 장면. 캐롤과 잭이 각자 떠난 뒤 잠시 로딩이 있다가 급히 나서는 테레즈. 여기까지가 영화의 오프닝이고, 각본엔 뒤에 나올 장면처럼 화장실에서 물을 적시는 테레즈의 장면이 이어진다. 

2. 리처드의 시덥잖은 농담을 귓등으로 듣는 테레즈 좋다. 텍스트로 보니 더 귓등으로 듣는 느낌이다. 

3. 백화점 구내식당에서의 색감들이 너무 내가 떠올리는 그 시설의 미국스러운 색감이다. 그 우중충한 분위기 너무 좋다. 각본집의 지문과 배경 설명은 영화 각본, 지문보다는 소설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든다. 생각보다 더 디테일하고 배경과 감정 묘사가 많다. 

4. 영화에서는 직원 지침서를 펴자마자 테레즈는 불려 나간다. 각본집에는 그 장면이 좀 더 길다. 각본에서 테레즈가 지침서를 읽다 우울해서 꺼내 든 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었다.

5. 눈빛과 존재감, 영화의 연출 만으로 테레즈가 느끼는 캐롤의 느낌을 포착하는 게 좋다. '이 곳에 존재하는 단 한 명의 사람 같은 느낌'이라는 지문도 너무 좋았다. 어쩜 이 지문들이 영화로 그대로 옮겨질 수 있었을까. 배우들의 눈빛과 연기와 모든 연출이 좋았다는 느낌이다. 근데 이걸 또 텍스트만의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 

6. 인형을 사러 온 캐롤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테레즈. 그리고 각본엔 없지만 케이트가 표현하는 캐롤의 몸짓이 너무 좋다. 자신의 목 뒤를 더듬거나 머리를 넘기거나 하는 것. 서로 교차하면서 서로에게서 눈 못 떼는 게 너무 킬링 포인트. 

7. 테레즈가 아무것도 공감할 수 없는 리처드와의 관계와, 어쩌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니와의 관계. 테레즈가 처한 관성적인 현실과, 자꾸만 마음이 가는 낯선 이름 캐롤. 장갑을 우편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딱 그 정도의 낯선 관계다. 각본엔 리처드와의 선을 긋는 테레즈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테레즈의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은 씬이었는데, 영화에선 삭제된 장면이다. 이 장면과 나중의 캐롤과의 여행에서 이어지는 장면이 대비되어 보일 수 있겠지만, 없어도 괜찮을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리처드의 비중이 작디 작아진 게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영화가 철저히 테레즈와 캐롤 중심이라 좋다. 

8. 캐롤이 테레즈의 우편을 받고 고민하고, 쪽지를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에서 빠졌다. 초반 좀 더 테레즈의 시점에서 전개가 되는 듯한 느낌을 위해서 인 것 같다. 이 장면 없이 전화로 식사를 제안하는 캐롤은 좀 더 거침없고 적극적으로 느껴진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인 것 같은 느낌? 존재만으로 테레즈를 지배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9. 몇번을 봐도 식당 창 밖에서 테레즈를 비추거나, 자동차 유리를 통해 비추는 장면들이 너무 좋다. 온전히 테레즈의 시선으로 창 밖으로 걸어오는 캐롤을 바라보는 것도 완벽하다. 

10. 레스토랑에서 둘이 만나는 씬은 정말 숨막힌다. 캐롤의 모든 몸짓이 극강의 우아함이다. 케이트 연기 진짜 완벽해... 자신의 목 뒤를 만지는 행동은 여기선 각본에도 포함되어 있다. 케이트가 연기하는 캐롤이 중심을 잡고 있고, 루니 마라가 표현하는 불안하고 불완전한 테레즈의 모습이 마음껏 표현되는 것 같다. 밸런스가 너무 좋다.

11. 마티니 마시면서 하는 대사와 눈빛 거의 청혼 아니냐구요... 식사해요, 놀러 와요,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이라니. 

12. 영화에 실리지 못한 장면들은 곳곳에 꽤 많이 있다. 

13. 캐롤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의 장면들은 각본에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오히려 영화의 장면들로 더 훅 지나간 느낌이 든다(물론 영화만 봤을 때는 충분하게 느껴졌다.). 시각적인 것들로 유추하던 테레즈의 마음을 들여다본 기분이다. 테레즈는 캐롤의 분위기, 외적인 모든 것, 매너 등등 모든 것을 동경하고 있었구나.

14. 엉망이 된 캐롤의 집에서의 밤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테레즈의 일상은 영화에서 빠졌다. 바로 영화에서처럼 캐롤이 전화를 거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는 게 더 좋다. 둘의 서사와 감정선이 더 쫀쫀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뭐라도 물어봐 달라는 캐롤은 정말 절박해 보인다. 

15. 영화만 볼 때는 테레즈가 레코드 가게에서 봤던 사람들이 전형적인(?) 뉴욕의 동성 커플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16. 테레즈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느낌이다. 사랑을 몇 번이나 해 봤냐고 리처드에게 묻고, 지금은 리처드를 만나고 있지만 테레즈야말로 어떤 종류의 사랑도 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캐롤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캐롤이 이렇게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17. 여행을 떠나기 전, 백화점 일을 정리하는 장면도 영화에는 실리지 않았다. 

18. 각본집에선 두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 전 애비와 테레즈가 만난다. 테레즈의 가벼운 질투와 캐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애비의 핑퐁이 좋다. 이 장면은 영상으로 보고 싶다. 

19. 두 사람이 차 안에 같이 있으면 내 심신이 평안해지는 느낌.

20. 여행 중에도 영화에 통으로 담기지 않은 장면이 있다. 타이어가 터져서 우연히 토미 파커를 만나 도움을 받는 장면. 재수없는 얼굴이니까 좀 덜 봐도 된다. 삭제 아주 적절해. 

21. 각본집을 따라 읽으며 영화를 보면 테레즈의 감정선을 좀 더 섬세하게 따라가는 느낌이다. 지문을 넘어서 테레즈가 느끼는 감정들이 더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테레즈를 위한 각본인 것처럼. 솔직히 케이트 블란쳇의 캐롤이라면 언제든 테레즈가 되고 싶다ㅜㅜㅜ.

22. 전화를 먼저 끊는 캐롤의 손 떨림은 지문에 없는데ㅜㅜ. 너무 좋다 섬세한 손 끝.

23. 각본의 순서와는 다르게 영화에는 여행을 다녀온 뒤 테레즈의 일상이 먼저 담겼다. 페인트를 새로 칠하는. 새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여전히 현상한 사진은 온통 캐롤의 사진뿐인 테레즈. 

24. 테레즈가 대니를 붙들고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아직도 캐롤이 많이 그립다는 걸 내뱉는 장면도 영화에는 담기지 않았다. 영화의 흐름만으로는 테레즈는 한 발자국 나아가 자신 나름대로 일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25. 취직하고, 마치 캐롤의 느낌을 풍기는 테레즈를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캐롤. 그 창 안에서 시선을 끝까지 가져가는 씬 정말 너무 좋다. 이때 테레즈를 보았기 때문에 양육권 포기 통보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정말...ㅜㅜ. 

26. 각본집에 캐롤이 테레즈에게 보낸 편지가 그대로 실려서 좋다. 그 편지는 그대로 구겨져서 결국 버려졌을까?

27. 재회씬에서 인형 코너에서 시작된 첫 만남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가 있다. 간질간질해. 

28. 재회씬은 늘 영화가 시작할 때랑 같은 장면인데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 잭이 오기 직전의 캐롤 대사 때문인 것 같다. 잭이 오기 전까지 두 사람이 나누던 눈빛도 그렇고. 정말 두 사람의 눈빛은 열 마디 대사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29. 파티에서 테레즈에게 다가온 여자 이름은 제네비에브였다. 그녀와 좀 더 적극적인 대화와 많은 상황과 여지가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짧은 인사만 나누고 나머지는 생략됐다. 처음 영화를 볼 때 테레즈에게 다가온 저 여자와 뭔가 더 스파크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맞았다. 제네비에브와의 장면들이 있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그녀와의 만남에서 캐롤을 떠올리는 테레즈의 모습도 보고 싶다. 물론 그 장면이 생략된 채 파티에서 내내 어울리지 못하고 곧바로 캐롤에게로 향하는 테레즈의 서사도 좋다. 

30. 엔딩은 몇번을 봐도 완벽하다. 테레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캐롤의 모습. 사람들과 어울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캐롤. 캐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테레즈. 이때 앵글은 꼭 캐롤에게 다가가는 테레즈가 된 것 같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미소 짓는 캐롤. 마주친 두 사람의 눈빛과 캐롤의 미소와 고조되는 음악. 각본은 내내 테레즈의 시점이었다가, 마지막 문장이 'THERESE has nearly arrived.'로 끝난다. 클로즈업된 캐롤의 미소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느낌. 너무 좋다ㅜㅜㅜ.

좋아하는 장면. 감정이 이미 시작된 둘의 간질간질한 대화.

좋아하는 영화를 나노단위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찐 행복이다. 영어 대사들도 곱씹을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잘 넣어 두었다가 다음 겨울 눈 내리는 날 또 들춰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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