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2020. 3. 7. 18:15몰입.log/독서

<피프티 피플>을 읽은 후에 홀린 듯이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었다.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으면서 또 홀린 듯이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찾아 놨다.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으면서 확신한 것 같다. 아... 나 이 작가님한테 치인 것 같아.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많은데, 항상 '새로 나온' 것은 설레는 구석이 있어서 다른 책들을 제치고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선택했다. 

<피프티 피플>을 먼저 접해서 이 작가님이 장르문학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옥상에서 만나요>를 읽으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장르 요소에 이 작가님 못 하는게 없구나? 싶었다. 근데 이쪽이 주특기셨나 보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으면서 확신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SF 단편집이고,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품 사이에는 8년 정도 갭이 있는 작품도 있는데, 작품들의 결이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랐다. 이 시대와, 환경과, 사람.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8편의 단편을 관통한다. 이런 세계라면 망해도, 사라져도 괜찮은 게 아닐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한결같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끈은 놓지 않는다. 

작가님의 글을 일단을 가독성이 좋다. 정말 술술 읽힌다. 그리고 재밌다. 내 세계가 무너지고 무엇이 윤리인지 알 수 없고, 지구를 포기해야 하고, 희망이 좀 있을까 싶은 다른 행성에서도 이곳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재미있다. 묵직한 주제들이 부드럽게 녹아 있는 것 같다.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초단편인데 그 초단편만에 점필 걸의 마음을 응원하고 싶어 졌다. 매니큐어로 바꿔치기하고 싶은 그 마음을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 두 사람의 각자의 방식으로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지겹지 말고, 상처 받지 말고. 이 책을 여는 적절한 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팍팍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세계와 시간을 넘나드는 사랑이야기를 해 볼 거라고요! 

1/11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학의 동아리 방에서 시작해서 중동의 부유국을 거쳐 알지도 못하는 행성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다. 유정과 기준이 온전히 살아서 4년의 비행을 했을까 싶다. 중력도 이길 허벅지를 갖게 된 기준은 그렇다 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함께 우주로 날아갈 유정은 에우로파에서, 얼음과 바다에서 잘 살아가고 있을까. 둘이 그 차가운 세상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나머지 10명에게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남았다. 윤리라는 문제는 늘 그런 것 같다. 남선의 멱살을 쥐어 잡고 싶다.

리셋
거대 지렁이들이 나타나 지구를 갈아 엎는 이야기. 주인공들은 당면한 위기를 이겨 나가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어딘가 저 지렁이들의 작업에 후련함을 느끼고 어떤 지지를 보낸다. 읽는 나도 그랬다. 인상 깊었던 것은 리셋 이후에 리셋조차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이야기였다. 지금 세대의 생활방식을 역겨워하는 그 이후의 세대. 

모조 지구 혁명기
지구와 닮은 듯 닯지 않은 어느 행성의 이야기. 어쩌면 지구의 추악한 면만 빼다 박았다. 이런 행성의 독재자를 디자이너라고 부르는 게 어쩐지 익숙했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
작가님은 누구의 이야기도 아니게, 건조하게 쓰신 글이라고 하셨는데 유난히 재미있었다. 3시간의 완벽한 기억을 보장해주는 약이 가져온 세상의 변화. 모든 것이 바뀌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 약 하나가 그동안 미뤄둔 과업 같았던 일들을 모두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게, 행동하게 한 점이 흥미로웠다. 어떤 사소한 것에 대한 개인의 망각과 사회가 잘못을 덮고 잊어버리는 것의 간극은 어디부터일까 고민하게 되는 글이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자신은 모르는 어떤 능력들을 갖고 있는 '괴물'들의 이야기. 히어로가 될 만한 능력이 아닌 탓일까, 그들은 수용소에 모여 있고 관리 아래 있다. 국가가 잡아 넣은 이 괴물들은 어쩌면 장벽 밖의 사람들보다 윤리적인 점이 돋보였다. 그들 몸에 심어진 능력이 괴물스러운 건지, 그것조차 이용해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괴물스러운 건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것은 다 됐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지. 살아는 있을지. 그녀가 정말 괴물이 아닐지가 궁금해졌다.

7교시
7교시의 어떤 내용은 먼 미래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굉장히 응원하면서 읽었다. 굉장히 애틋하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작가의 말에 언급하신 '그 댓글'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니 진짜 그랬으면 어쩌지? 진짜 참치 캔만 떨궜으면 어쩌냔 말이야???  


8편을 다 읽고 나면 문득 작가가 두려워 하는 일을 나 역시 두려워하고 납득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하는 일 말이다. 작가님은 늘 그런 일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과거 세기 일어났던 폭력을 역겨워하는 것처럼. 

부디 자신의 DNA를 후세에 남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렁이가 이 지구를 뒤집어엎는 리셋이 일어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완벽히 만들어진 전혀 다른 세계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작가님 글을 읽다보니 지금 여기를 기반으로 한 범우주적(?) 이야기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자꾸 이 이야기들로 누군가와 도란도란 떠들고 싶어서 주변에 막 추천하고 싶다. 제발, 제발 읽어주세요!

한 작가가 만들어 내는 세계와 결을 오롯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일은 너무 짜릿하고 기쁘다. 믿고 볼 수 있는 작가가 생기는 일은 내 책장의 컬랙션을 풍요롭게 하는 기분이 든다. 한 책장을 한 작가의 책으로 채우는 일이 좋았다. 새삼 어릴 때부터 '작가'에 꽂혀 사 모은 책들은 모두 여성 작가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내 세계를 채워주는 작가님들에게 짝사랑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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